쌀의 기억, 예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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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기억, 예술이 되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에 자리한 110년 된 정미소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간직한 현대미술 전시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춘포의 농업사와 근대 건축의 흔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춘포 도정 갤러리’다.

오랫동안 쌀을 가공하던 산업시설은 기존 건물의 시간성을 품은 채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낡은 구조물과 현대미술 작품이 한 공간에 놓이면서 춘포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차분하게 연결한다.

1914년 세워진 춘포 도정공장

춘포 도정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당시 춘포 일대를 소유했던 일본인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세웠다. 쌀 생산량이 많았던 춘포지역에서 벼를 거둬 도정한 뒤 일본으로 보내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후 정부와 민간이 소유한 도정공장으로 운영됐으나 1998년부터 방치됐다. 생산시설로서 기능을 멈춘 건물에는 춘포의 농업과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그대로 남았다.

현재 건물은 갤러리로 개조돼 주민과 관람객을 위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래된 도정공장의 구조와 재료를 살린 공간은 춘포마을의 풍경과 어우러지며, 지역의 아픈 역사를 되짚고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도정공장에 들어온 현대미술

갤러리에서는 지나손 작가의 ‘선 이전의 회화 Painting Before Line’ 전시가 진행된다. 전시 기간은 2026년 4월부터 2027년 3월까지다.

이번 전시는 선이 그어지기 전 회화가 시작되는 조건에 주목한다. 캔버스는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채 빛과 습기, 먼지, 식물의 접촉과 같은 변화를 받아들인다. 같은 시간을 지나더라도 캔버스마다 남는 흔적과 변화의 정도는 다르다는 점을 작품으로 보여준다.

약 1년에 걸쳐 캔버스의 상태가 서서히 달라지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그림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소와 계절이 캔버스 위에 흔적을 더하면서 작품이 계속 변해간다.

빈자리와 흔적도 작품의 일부

관람할 때는 완성된 그림을 찾기보다 회화가 시작되는 조건을 살피는 것이 좋다. 캔버스 위의 빈자리와 얼룩, 먼지, 표면의 처짐과 접촉 흔적, 빛이 들어오는 방향까지 모두 작업을 이루는 요소다.

캔버스만 따로 바라보기보다 작품이 놓인 벽과 바닥, 통풍구, 식물과 새가 남긴 흔적, 바람의 방향을 함께 관찰하면 전시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변화를 함께 만드는 주체로 다뤄진다.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나 잔여물, 나뭇가지와 각종 흔적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도정공장이라는 장소가 캔버스에 남긴 기록이므로 작품을 손으로 만지지 않고 변화의 시간을 지켜봐야 한다.

아직 선이 그어지지 않은 빈 화면도 결핍이나 미완성으로만 볼 수 없다. 장소와 시간이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둔 상태라는 점에서 전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전시

작품은 습도와 계절, 생물의 이동과 작가의 개입에 따라 천천히 다른 상태가 된다. 어느 날 확인한 캔버스의 표면이 다음 달에는 달라질 수 있어, 다시 방문하면 이전과 다른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래된 건물의 질감과 젖은 마을 풍경이 어우러져 공간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더욱 선명해진다. 관람객은 도정공장 내부와 작품을 오가며 건물이 지나온 시간과 캔버스에 새롭게 쌓이는 시간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관람 정보

시설명춘포 도정공장 갤러리
전시명지나손 ‘선 이전의 회화 Painting Before Line’
전시 기간2026년 4월부터 2027년 3월까지
관람료1인 1만 원, 아메리카노 포함
미취학 아동무료
입장 방법현장 키오스크 결제 후 입장
주소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춘포면 춘포4길 66-6
주차별도 주차장 없음

별도로 조성된 주차장이 없어 차량을 이용하는 관람객은 인근 골목의 주차 여건을 확인해야 한다. 보행자와 마을 주민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춘포 도정 갤러리는 오래된 정미소를 단순히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적 건축물 안에서 시간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춘포를 찾는다면 마을의 역사와 현대미술이 만나는 독특한 장면을 함께 살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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