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전통주 명맥 잇는 새 바람

익산 전통주, 뿌리 깊은 명주 이야기
전국 각 지역을 취재하며 그 지역의 문화와 축제, 여행지뿐 아니라 오랜 세월 전승되어 온 전통주 역시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익산과 인접한 전주에서는 ‘이강주’, 정읍에서는 ‘죽력고’가 조선의 3대 명주로 손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익산을 대표하는 전통주로는 궁궐에 진상되며 뛰어난 맛과 향으로 알려진 ‘여산 호산춘’이 있습니다.
여산 호산춘, 가람 이병기 선생 가문에서 시작된 명주
‘여산 호산춘’은 익산시 여산면 천호산 일대, 특히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 선생의 종가에서 유래한 술입니다. ‘호산’은 천호산에서, ‘춘’은 봄을 뜻하는 글자로, 맛과 향이 뛰어난 명주에는 봄 ‘춘(春)’ 자를 붙이는 전통을 따릅니다. 이병기 선생도 호산춘을 빚어 지인들과 나누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가양주,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전통의 술
‘가양주’란 집에서 직접 빚는 술로, 대량 생산되는 공장 술과 달리 각 가정이나 종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과 지역의 제철 곡물, 꽃, 약재 등을 활용해 빚는 우리 고유의 전통주입니다.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와 손님 접대에 쓰이며, 그 집안의 가풍과 안주인의 솜씨를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여산 호산춘 역시 이 지역을 대표하는 가양주로, 궁궐에 진상될 만큼 귀하게 여겨졌고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호산춘의 제조법과 특징
호산춘은 찹쌀과 누룩, 솔잎을 사용해 밑술과 두 번의 덧술을 거치는 삼양주로, 서늘한 곳에서 최대 100일간 숙성시켜 완성합니다. 맑은 호박빛에 은은한 솔향과 깊고 묵직한 감칠맛이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처럼 정성껏 빚은 가양주는 집안의 자랑이자 귀한 손님에게 내놓는 술이었습니다.
전통주의 르네상스와 일제강점기의 시련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양주는 전통주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일제강점기 주세법 시행으로 자가 양조가 금지되면서 가양주 문화는 급격히 사라졌습니다. 여산 호산춘도 이 시련을 겪었으나, 일본 순사들이 그 맛과 향에 감탄해 술만 압수하고 처벌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명인의 별세와 전승의 과제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인 여산 호산춘의 보유자였던 고 이연호 명인이 지난해 별세하며, 호산춘은 다시 전승의 기로에 섰습니다. 한 가문의 비법이자 지역의 소중한 무형유산인 호산춘이 잊히지 않도록 지자체와 지역사회의 관심과 전승 대책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청년 양조장 초이리 브루어리, 전통주에 새 숨결
익산 도심 모현동과 송학동 인근에 위치한 ‘초이리 브루어리’는 최상은·이경택 부부 양조인이 운영하는 수제 전통주 양조장입니다. 두 사람의 성씨 ‘최’와 ‘이’, 그리고 익산의 옛 지명 ‘이리’를 합쳐 이름 지은 이곳은 익산시 청년창업 지원을 받아 문을 열었으며, 선조들의 가양주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익산 농산물로 빚는 다양한 전통주
초이리 브루어리는 인공 감미료를 배제하고 익산산 쌀과 지역 특산물, 전통 누룩만을 사용해 술을 빚습니다. ‘초이 국화16’은 익산의 시화인 국화와 5가지 누룩을 블렌딩해 만든 약주로, 산뜻한 산미와 은은한 국화 향이 특징이며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리28’과 ‘리19’는 고구마 100%로 빚은 증류식 소주로, 고구마 특유의 구수하고 달콤한 풍미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초이리 딸기13’과 ‘시트러스 13’은 익산산 생딸기와 감귤류를 넣어 빚은 고도수 프리미엄 막걸리로 젊은 세대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익산 전통주의 미래
수백 년을 이어온 가람 가문의 여산 호산춘과 젊은 감각으로 익산의 사계절을 담아내는 초이리 브루어리는 ‘우리 땅에서 난 재료로 정성을 다해 빚는 술’이라는 가양주의 본질을 공유합니다. 고 이연호 명인의 빈자리를 채우고, 지역 농산물로 새로운 전통주 문화를 개척하는 청년 양조인들의 도전을 응원할 때, 익산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진정한 전통주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장소 안내
-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전북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 초이리 브루어리: 전북 익산시 선화로63길 30-1 1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