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류시인 김사의당의 삶과 문학

조선시대 여류 시인 김사의당의 특별한 삶
조선시대 여성 문인이라 하면 흔히 신사임당, 허난설헌 같은 사대부 집안 출신이나 매창, 황진이 같은 기생 출신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대에 평범한 여염집 여인으로서 일상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여류 시인 김사의당입니다.
김사의당은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여성 문인 중 가장 많은 한시와 산문을 남긴 인물로, 그녀의 문학 세계는 당시 여성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을 뛰어넘은 정신적 이상향을 반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녀의 출생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든 특별한 문학 세계를 살펴봅니다.
남원 교룡방 유천마을에서 태어난 김사의당
김사의당은 1769년(영조 45년) 10월 13일, 전북 남원시 교룡방 기슭 유천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8세가 되던 해인 1786년(정조 10년) 봄, 같은 마을에서 같은 날 태어난 동갑내기 하립과 결혼합니다. 두 사람 모두 몰락한 가문의 후손으로, 김사의당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사관 김일손의 11대손 김인혁의 딸이며, 남편 하립은 세종조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12대손입니다.
부부의 도와 문학적 교감
첫날밤, 부부는 충효에 대해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신세계와 문학적 재능을 확인합니다. 김사의당은 "부부의 도는 인륜의 시작이요, 만 가지 복이 이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니, 침실에서 잘하는 것도 집안에서 잘하는 것도 모두 남편에게 달렸다"는 뜻을 시어로 표현해 남편 하립을 감탄하게 했습니다. 이에 하립은 아내의 충성, 효도, 절개를 뜻하는 ‘삼의(三宜)’라는 당호를 지어 존경을 표했습니다.
과거시험과 가난 속에서도 변함없는 내조
두 사람은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과거 급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립이 과거 공부를 떠나자 김사의당은 편지로 그리움을 전하며 남편의 입신양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뒷바라지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양식을 보내고, 비녀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는 등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남편을 격려했으나, 낙방 소식만 들려왔습니다.
그럼에도 김사의당은 남편의 꿈을 접고 진안 방화마을로 이주해 농사를 지으며 전원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1823년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농촌의 풍경과 일상을 시로 노래하며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김사의당의 문학과 유산
김사의당의 출생지인 남원시 서봉방과 교룡산 국민 관광 단지 내에는 그녀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진안군 마이산 입구 부부공원에는 그녀와 남편 하립을 기리는 명려각과 시비가 있습니다. 명려각은 음양을 상징하는 부부를 뜻하는 ‘명(明)’과 김사의당 작품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려(麗)’를 합친 이름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삼의당김부인유고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99편 264수의 시와 22편의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애정과 기대, 일상생활과 전원의 풍경을 섬세하게 담아낸 이 작품들은 조선시대 여성 문학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현대에 되새기는 김사의당의 가치
200여 년 전 호남 산골에 묻힐 뻔했던 김사의당의 시문집은 오늘날 부부 관계와 정신적 의식이 해이해지는 사회적 현상 속에서 다시금 조명될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의 삶과 문학은 조선시대 여성의 내면과 사랑, 그리고 현실을 담아내며,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