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원촌마을 가을, 선비정신과 역사 숨결

호남 3대 명촌, 전북 정읍 원촌마을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위치한 원촌마을은 전남 영암 구림마을, 나주 금안마을과 함께 호남 3대 명촌으로 꼽힙니다. 영암 구림마을이 2200년의 유구한 역사와 백제 왕인박사, 신라 도선국사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고, 나주 금안마을은 신숙주가 태어난 곳으로 서원이 세 곳이나 있을 정도로 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에 비해 원촌마을은 서원의 수는 적지만 독특한 특징을 지닌 무성서원이 자리한 곳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태산선비문화의 중심지, 무성서원과 둘레길
원촌마을은 태산선비문화의 중심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무성서원과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의 상춘곡, 그리고 구한말 의병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태산은 현재 정읍시 칠보면과 태인, 산내, 산외면을 아우르는 옛 지명으로,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하며 시작된 지역 특유의 선비문화를 의미합니다.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필양사, 한정, 송산사, 사산사, 후송정 등 여러 서원이 연결된 서원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총 1.6km 길이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이 둘레길은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 유폐에 반발한 태인의 일곱 선비들의 충절을 따라 걷는 길로, 가을 만추의 계절에 걷기에 적합합니다.
서원의 역사와 선비 공동체 정신
조선시대 각 현마다 향교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 기능이 약화되자, 조선 중기 사림세력이 지방으로 낙향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원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선현을 모시는 공간이자, 선비들이 마을 규약을 만들고 백성을 교화하며 이상적인 성리학적 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호남 3대 명촌 모두 마을 규약인 향약이 존재할 정도로 선비들의 공동체 정신이 투철했으며, 특히 원촌마을은 조선 최초의 민간 향약으로 평가받는 태인고현동향약이 시작된 곳입니다.
무성서원과 호남 의병운동의 발상지
원촌마을의 핵심 유산은 해동 유학의 창시자 최치원을 배향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무성서원,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의 상춘곡, 그리고 호남 최초의 의병 항쟁 역사 현장입니다. 1906년 병오년 면암 최익현이 을사늑약에 항거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병오창의기적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무성서원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해 800여 명의 의병이 태인, 정읍, 순창 등지로 진출했으나 관군 출동으로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자진 해산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호남 전역에 항일 의식을 확산시킨 의병운동의 출발점으로,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 투쟁 끝에 순국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와 보수 공사
무성서원은 2019년 영주 소수서원, 안동 안동서원, 병산서원 등 8개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주향 인물은 우리나라 유학의 시조 최치원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특별자치도 유일의 서원입니다.
현재 명륜당은 기둥 보수와 기단 정비 공사가 진행 중이며, 1825년 화재로 소실된 후 1828년 중수한 이후 거의 100년 만에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무성서원의 특별함
대부분 서원이 마을 중심에서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것과 달리, 무성서원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해 마을과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제향과 유학 공부 공간을 넘어 마을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합니다.
최치원은 신라시대 우리나라 최초 조기유학생으로 12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30세에 태산군수로 부임했습니다. 임기 후 마을 주민들은 그의 선정에 보답하고자 생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정극인과 가사문학의 효시 상춘곡
무성서원 인근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인 무성리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극인의 묘역 영모재가 향학당 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극인은 낙향 후 초가삼간 불우헌을 짓고 가숙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의 문학적 소양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을 탄생시켰습니다.
상춘곡은 칠보면의 봄 풍경을 노래한 작품으로, 수능 논술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는 등 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상춘곡 공원과 태산선비문화사료관
무성서원과 정극인의 묘, 향학당 탐방 후 원촌마을 상춘곡 공원으로 이동하면 태산선비문화사료관과 한정, 필양사, 송산사, 시산사, 송정 등 정자와 정극인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는 최치원부터 정극인, 송세림, 김약묵, 신잠, 이항 등 태산 지역 선비문화와 고현동향약에 대해 배울 수 있으며, 상춘곡 원문과 칠보면의 다양한 문화유산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살아 숨 쉬는 역사, 원촌마을과 무성서원
원촌마을과 무성서원은 높은 담장으로 닫혀 있는 여느 서원과 달리 마을 한복판에서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진정한 소통과 공동체 가치를 보여줍니다. 해동 유학의 시조 최치원과 정극인의 상춘곡, 그리고 구한말 최익현 의병장과 수백 의병의 뜨거운 함성까지, 대원군의 철폐령도 꺾지 못한 선비 정신이 고즈넉한 돌담길마다 깊게 배어 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의미를 간직한 무성서원과 원촌마을에서 시대를 초월한 선비의 맑은 숨결을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