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용사 손양기 어르신의 생생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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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 용사 손양기 어르신의 생생한 증언

6·25 참전 용사 손양기 어르신의 생생한 증언

6·25 전쟁 당시 소년 전차병을 꿈꾸며 고향 익산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손양기 어르신의 이야기가 현장 분위기와 함께 전해졌다. 1949년 3월 11일, 육군독립기갑연대에 입대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일본군 막사로 쓰이던 건물과 27대의 M8 장갑차가 전부였던 현실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훈련은 주로 장갑차를 닦는 일이었고, 이후 영등포 육군통신학교로 옮겨 통신병 교육을 받았다. 나무 전주에 올라 전선을 가설하고 모스부호를 익히는 기초교육을 마친 뒤, 1대대 1중대 1소대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김포 육군공병학교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장갑차를 타고 한강교 경비에 나섰으나 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이후 김포로 돌아가 수색 임무를 받았으나, 이동 중 운전병이 사망한 채 핸들을 잡고 있는 충격적인 상황을 겪었다. 정신없이 탈출해 영등포, 수원, 여수, 부산을 거쳐 부대로 복귀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통신병 임무를 수행하며 전장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된 부호를 해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밤잠을 줄여가며 암호를 해석해 부대의 작전과 보급품 전달에 큰 역할을 했다. 그의 헌신은 은성화랑무공훈장과 금성화랑무공훈장 수상으로 이어졌다.

1955년 제대 후 고향 익산에서 34년간 철도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무궁수훈자회 익산지회를 창설해 참전 용사들의 복지 증진과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후배 군인들에게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살고 죽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영웅의 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손양기 어르신은 오늘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그날의 청춘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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